아주 먼 옛날의 기억 속에 있던 설날에 얽힌 일화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저는 설날에 누이 혼자 오지 않고 결혼할 배우자와 함께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더욱 들떠 있었어요. 나에게는 매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기에 어떤 모습일지 기대도 컸고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설날


1981년 새해 어느 날, 설날을 코앞에 두고 집안 어르신들이 갑자기 저희 집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긴급 문중 회의가 진행되었어요. 누이의 결혼 상대자가 고향이 전라도라는 것 때문이었지요. 불과 몇 개월 전, 전라도 광주에서 민주화 항쟁으로 인한 역사적인 비극이 일어났고 신 군부는 언론 통제 하에 일부 광주 시민들을 간첩으로 보도했던 바람에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간첩일 수도 있는 전라도 남자를 문중에 들일 수 없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선입견과 우격다짐으로 인해, 묵묵히 입을 닫고 계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래도 시간은 정석대로 흘러갔고 설날 바로 전날, 예정대로 누나와 결혼을 허락 받기 위한 전라도 남자가 저희 집 마당으로 들어섰어요. 당시 제가 본 느낌은 키와 덩치가 컸어도 선한 얼굴을 한, 꽤 훈남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안 어르신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셨고 그 자리엔 아버지도, 결혼을 허락 받기 위해 누이와 함께 온 전라도 남자도 함께 했습니다.


다짜고짜 주민등록 등본을 떼왔느냐고 묻는 문중 어르신들..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는 남자..
지루하고 긴 실랑이가 끝나고 대체 요구 조건으로 주민등록증을 다시 요구하시는 문중 어르신들..

그때야 무릎까지 내려왔던 회색 바바리 코트 안에서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을 어르신들께 내주었습니다. 마치 심문을 하고 있는 형사들처럼 이리저리 살펴보고 주민등록증 뒷면에 있는 엄지손가락 지문까지 살펴보시더니, 그래도 의심의 눈초리가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이번엔 또 주민등록증이 가짜일 수 있다는 둥 위조했을 수도 있다는 둥 억지 논리를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딱 거기까지만 듣고 다른 방으로 옮겨갔어요. 그래서 그 이후의 뒷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다음날 아침 저희 삼형제는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어머니의 충고를 듣고 바로 알 수 있었어요.

"너희들끼리만 있지 말고 앞으로 매형이 될 사람이니 예의 바르게 모셔라!"

불과 어제 저녁때까지만 해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이렇게 좋은 결말로 이어졌는지 신기할 뿐이었어요. 아마도 아버지께서도 저처럼 첫 인상이 마음에 들어 집안 어르신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하셨던 건 아니었을까싶습니다.

결국 저에게는 해피엔딩을 지켜볼 수 있었던 잊지 못할 설날이 되었고 전라도 남자, 아니 매형은 절망의 늪에서 헤쳐 나온 잊지 못할 설날이 되었을 겁니다. 짜릿하고 행복한 설날을 보낸 뒤 그해 겨울에는 두 분이 아름다운 화촉을 밝혔고 지금은 누이와 함께 경북 봉화로 내려와 제 2의 인생 도전을 막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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